지금은 처분해버리고 없는 책들 중에서 생각해보면 좀 아쉬운 물건들이 있는데, 그 중 하나가 바로 어린 시절에 가지고 있던 동화 전집입니다. 국내 작가들의 창작 동화집이었고, 출판사는 아마 계몽사로 기억되는군요. 그러고보면 예전에 계몽사에서 나온 책들을 꽤 가지고 있었죠. 그 중에는 어릴 때 정말 많이 본 일본 걸 카피한 것으로 보이는(혹은 일본 책의 자료를 다수 사용한 것으로 보이는) 어린이 대백과 사전 세트도 있었고…
아무튼 이 동화 전집은 꽤 권수가 많았습니다. 거의 20~30권은 넘었던 것 같고 40권까지는 안 됐던 듯 싶고 말이죠. 수록된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가 대략 50~80년대 정도? 첫머리에 썼듯이 지금은 유실되고 없습니다. 아마도 꽤 예전에 공간 부족으로 인해 처분한 것으로 보이는데 지금 생각하면 참 아쉽습니다.
수록된 작품들이 쓰여진 시기가 제가 읽었던 시기(아마 80년대 중반~후반 정도로 기억됩니다)보다 대체로 앞서있던 지라 당시와의 미묘한 차이점들도 재미있었고, 작품들 자체도 꽤 재미있는 게 많아서 꽤 자주 읽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만 지금 생각하면 좀 아쉬운 것이 삽화가 취향에 맞는 걸 우선적으로 읽고, 그렇지 않은 경우는 잘 손을 대지 않았다는 점. 이런 점 때문에 재미있는 작품을 건질 수도 있었던 기회를 놓치지는 않았을까 라는 생각이 들어서 아쉽다고 할까요. 정말 무슨 라이트 노벨 고르는 것도 아니고… OTL
그런고로 이 전집에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작품들에 대해서 간단하게 써볼까 합니다. 기록을 위한 포스팅일 수도 있고 말이죠. 좀 길어질 듯 한고로 접어 놓습니다.
[#M_more…|less…| – 어린 소년인(아마도 국민학생?) 주인공이 시골에서 올라온 할아버지를 모시고 할아버지께 서울 구경을 시켜드릴 겸 언니의 야구 경기를 보러 가는 이야기가 있었습니다. ‘언니’ 라는 호칭을 쓰지만 주인공도, 언니도 모두 남자입니다. 이걸 읽고 어린 시절 ‘아, 예전에는 형에게도 언니라는 호칭을 쓰곤 했구나’ 라는 걸 알았지요. 비슷한 예로 다른 작품에서 ‘동무’라는, 당시로서는 반공물에서나 쓰이던 단어도 일상적으로 사용되던 것이라는 걸 알았던 경우도 있습니다. 그리고 예전에는 고교 야구가 굉장히 인기였구나, 하는 것도 어렴풋이 알게된 이야기였죠.
할아버지와 함께 목적지인 동대문 야구장까지 가는 동안에 이런저런 에피소드들이 생기죠. 버스와 관련된 것도 있었던 듯 한데, 잘 기억이 안나고 백화점이었던가에서 엘리베이터를 타는데 신발을 벗고 타는 거라든가 등등. 야구장에 도착해서는 할아버지에게 룰 설명해준다던가, 중간에 할아버지가 사이다를 산다던가… 그리고 주인공의 언니는 제 기억으로 포지션이 투수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나중에는 홈런도 쳤던 듯. 그리고 마지막에 할아버지가 수훈 선수의 할아버지로서 인터뷰를 하는 장면이 끝이었죠.
– 어떤 학교(아마도 국민학교)의 여선생이 시험 감독을 하면서, 아이들을 의심하는 감독이라는 행위를 방기하고 창 밖을 내다보면서 하늘을 떠다니는 민들레 씨앗과 함께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작품이 있었습니다. 단편이 많았던 이 전집에서는 보기 드물게 아마 책 한권을 다 썼던 작품인 듯. 어린 시절 이야기들(자기보다 나이가 많은 아저씨 조카 라든가)부터 시작해서 다 큰 지금의 조카 이야기 등등 일상적인 이야기들이 주욱 이어지는데 이것이 왠지 꽤나 마음에 들었습니다. 크게 굴곡이 있는 이야기도 아니었지만 상당히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던 작품이죠.
– 꽤 부유한 어떤 아기 없는 부부 중 부인이 자신들의 넓은 집에서 유아원 비슷하게 동네 아이들과 접하며 행복해 하는 이야기. 그런데 이 이야기는 좀 기억이 애매합니다. 이 부부가 아이가 없던 것이 임신이 안 되서였던지, 아이가 있었는데 실종된 것이었는지 말이죠. 그리고 이것과 연관해서 동네 아이들과 관련한 사건이 있었는지 없었는지도 헷갈리는 부분입니다.
– 인어 이야기. 사실 이 이야기는 이 전집에서 본 건지, 아니면 다른 동화 모음집에서 본 건지 정확하지를 않습니다. 어쩌면 둘 다 수록되어 있었는지도… 이 동화에 대해서는 SeaBlue님이 포스팅하셨으니 그 쪽을 보시면 원문을 포함해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아무튼 이 작품에 대한 인상은 상당히 다크하다는 것이었죠. SeaBlue님의 포스팅과 원작을 보시면 아시겠지만 일반적인 아동용 동화책이라는 느낌은 전혀 아니었습니다. 어린 마음에도 그런 부분이 꽤나 인상깊게 남았다고 할까요. 그런데 지금 생각해보면 예전의 한국 창작 동화들을 보면 그런 성향의 작품들이 꽤 되는 것 같았다고 할까요. 여러모로 재미있는 작품이었습니다.
– 동일한 작가의 작품으로 ‘꿈을 찍는 사진관’ 이 있었지요. 성인인 주인공이 꿈을 찍는 사진관에 찾아가 꿈을 찍는 이야기입니다. 그런데 사실 이 작품도 애들을 위한 작품이라고 보기는 좀 힘든 것이, ‘성인이 추억에 대해서 논하는’ 그런 작품이었거든요. 사실 애들에게 추억이라는 것 자체가 어울리지 않는다는 걸 생각하면 역시 동화의 탈을 쓴 성인용 소설이라고 봐야 할 듯…
– 계속 다크 시리즈가 이어지는데, 병약한 딸을 혼자 두고 생계를 위해 일을 나가는 홀어머니와 딸의 이야기. 딸을 위해 꽃을 따와서 꽃병에 꽂아주고 일을 나가고, 딸은 꽃과 함께 이야기하며 전개되는 동화입니다만…. 어머니가 밖에 나가 일하는 사이 소녀는 심한 열에 의한 목마름에 시달리지요. 동시에 꽃병에 물이 부족해진 꽃도 목마름에
시달립니다. 소녀는 어머니를 찾으며 ‘물! 물…!’하고 애타게 외치고, 꽃도 함께 ‘물! 물…!’하고 애타게 외칩니다.
하지만 일하러 나간 어머니는 당연히 올 줄을 모르고… ‘물!’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소녀와 꽃은 동시에 죽어버리지요.
개인적으로 굉장히 인상깊었던 작품이었습니다. ‘이런 동화를 더 많이 내 줘, 제발!’ 이라는 생각을 한 저는 지금 생각해보면 참 기분나쁜 꼬마였구나 라는 생각도 들고… 여러모로 포스가 강렬했던 작품이죠.
– 지금 생각해보면 해방 후에서 6.25 직후 정도의 시기에는 정말로 이런 ‘진지한 동화’가 꽤나 많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지금 읽어봐도 포스가 만만치 않은 작품들이지요.
– 4.19 관련한 동화도 있었습니다. 학생들의 시위에 주인공이었던 꼬마도 참가하던가 하는 내용이었죠. 아마 주인공의 형과 무슨 관련이 있었던 듯 한데 정확하게는 기억이 안 납니다. 내용은 대략 경무대 앞까지 진출한 시위대에게 경찰들이 발포를 시작하고 주인공인가, 주인공의 형인가가 죽는 이야기였던 걸로 압니다.
– 위 작품과 항상 페어로 기억나는 게 ‘유신 찬양 프로파간다 동화’ 입니다. -_- 어떤 주택가 골목이 배경이고 문방구 겸 구멍가게 할아버지가 등장하죠. 전형적인 엄하면서도 인자한 주인 할아범의 전직은 교장 선생. 그럭저럭 잘 나가다가 막판에 애들 모아놓고 유신의 당위성을 논하며 만주군 장교 출신 다카키 마사오 찬양으로 나가는 막장 전개.(….) 29만원짜리 전대갈이 짱먹던 시절에 세뇌받은 국민학생 머리로도 ‘이뭐병…’ 을 느꼈으니 이건 뭐…(먼산) 아마도 프로파간다 라는 걸 어렴풋이나마 생각하게 된 게 이 동화를 읽고 나서였으니 결과적으로 제게는 도움이 된 거….겠죠?
아무튼 저런 작품들이 한 전집 안에 있었다는게 어린 마음에 참 아이러니였죠. 뭐, 정치적으로 생각해보면 잘 이해되는 일이었지만요. -ㅅ-
– 예술에 혼에 불타는 젊은 두 학생(아마도 중학생 내지 고교생) 이야기. 미술 대회에서 라이벌에게 패배한 주인공이 밤에 몰래 전시장에 침입해 라이벌의 천재성을 느끼면서도 라이벌의 그림을 찢어 버리고(아마 자신의 그림도 찢었던 듯) 도주. 그러나 양심의 죄책감을 느끼고 선생에게 고백, 라이벌에게도 용서를 빌고 언제나 그렇듯 화해한 후 다른 그림을 걸어 놓는 이야기. 딱 모짜르트와 살리에리 이야기의 변용인 거죠, 뭐. 🙂
– 야간 경비원 할아버지를 둔 탐정 소년의 활극. 할아버지가 야간 경비를 맡은 창고가 계속 털리면서 누명을 쓰게 되자, 소년이 잠복 후 미행을 통해 아지트를 찾아내고 경찰에 신고하면서 해피 엔딩~ 왠지 한 때 유행했던 소년 탐정단물들의 느낌이 나는 이야기였습니다. 나무로 된 대문인가 담장에 분필로 표시해 둔 것이 왠지 기억에 남았죠.
– 한 밤중에 종이배를 타고 동물들의 세계(라고 할까 숲이라고 할까)에 가는 이야기. 의인화된 동물들이 연극제도 하고 그랬던 듯 하지만 잘 기억이 안 나는군요. 여러모로 실제 사회에 대한 은유라든가 비유가 있었던 듯 한데, 역시 기억이… 다방에서 나무 열매들로 만든 차가 나오는 것이 지금도 기억에 나네요. 🙂
– 무려 SF로 등에 금고용 다이얼이 달린 소년 안드로이드가 등장하는 이야기. 아버지가 만들어 준 이 친구 안드로이드를 악용하고 잘못 쓰게 되면서 벌어지는 이야기. 등에 달린 다이얼이 아마도 태엽 비슷한 것이었던 듯 한데, 이걸 과도하게 돌리면서 문제가 벌어지기도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당시 의식이 없는 안드로이드의 웃옷을 들춰올리고 등에 달린 다이얼을 돌리는 삽화에서 왠지 어린 마음에 에로티시즘을 느꼈다는 건 비밀.(…) 사실은 소녀였다면 엄청 좋았을텐데, 라는 생각도 했다는 것도 비밀.(…)
– 한국 전쟁을 배경으로 학교가 군 야전 병원으로 징발되어 사용되서 휴교가 된 국교의 학생과 경비병의 우정을 그린 이야기. 담장 경비를 서던 병사와 친하게 되면서 등목하는 동안 대신 총도 들고 있다가 장교에게 걸리기도 하는 에피소드도 있었죠. 마지막에 전선이 이동하면서 병원도 이동하게 되면서 끝나죠. 병사가 탄 트럭을 소년이 쫓아가다가 넘어지던가 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 때 병사가 내려서 얼굴을 닦아줬던가 아닌가는 좀 가물가물하네요.
_M#]
대략 이 정도인데, 어쩌면 앞으로도 조금씩 생각나는게 있으면 업데이트 할 지도 모르겠습니다. 이 전집은 지금도 기회가 되면 다시 구하고 싶기도 한데, 물건이 있을지도 모르거니와 둘 공간이 없어서 언제가 될지 모르겠네요.
이외에도 다니 아저씨의 신나는 이야기라는 외국 동화책과 한국 창작 동화집도 몇권 재미있게 읽었던 것들이 있는데, 나중에 찾아보고 한 번 포스팅할지도 모르겠습니다.
NOT DiGITAL